Friday, June 19, 2020

Special lecture at Hanshin Graduate School of Theology, Seoul, Korea (2018)



This is a Korean lecture.
Title: Jesus's parables and matters of justice.
When: May 30, 2018
Where: Seoul, Korea

*The similar content of this lecture was published in English:


예수의 비유와 정의의 문제
인간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정의”만큼 중요한 것이 있을까 생각해본다. “정의”라는 한자의 뜻은 바르고 의롭다이다. 혹은 바르고 옳은 것을 말한다. 영어로는 justice이고 성서적 개념에서는 justice외에 righteousness도 있다. 각자 무엇이 바르고 의로운 일인가를 정의할 수는 있겠지만 실상은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왜냐하면 정의의 개념이 하나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때로는 어떤 삶의 현장에 정의의 개념을 잘못 적용할 수도 있다. 우리가 무엇을 옳다고 할 때 그렇게 말하는 정의의 기준을 밝힘과 함께 과언 그렇게 말하는 정의가 전부인지 아니면 다른 모습의 정의가 있을 수 있는지 늘 살펴야 한다. 인간의 삶이 다양하고 복잡한만큼 거기에 따르는 정의의 모습도 그러하다. 한 가지의 정의의 개념으로 모든 삶의 현상에 적용할 수가 없다. 그래서인지 예수의 비유가 다양하고 비유에 따라서 다른 개념의 정의가 적용된다. 본 특강에서는 먼저 비유의 간단한 종류와 개념을 알아보고, 그 다음으로 성서에서 “정의”의 개념을 찾아보고, 마지막으로 예수의 비유 중 세개를 골라 그 가운데 말하고 있는 정의의 문제를 짚어보고자 한다.
I. 정의의 종류와 개념
1. Attributive justice (귀속적 정의)
정상적인 환경아래에서 각자는 일한 만큼 보상을 받는다. 정상적인 환경: 일하는 조건이나
개인의 능력이 비슷할 때.
2. Retributive justice (보복적, 징벌적 정의)
잘못을 저지른자는 정의의 법정에 세워지고 합당한 벌을 받고, 피해는 보상되고 불의의 원인은 명명백백하게 밝혀지고 재발이 방지 되는 것. 복수와는 다르다. 복수는 법의 근거없이 과도하게 갚아주는 것.
3. Distributive justice (경제 배분적 정의)
사회의 구성원의 수요에 비추어 부의 균등한 배분이 필요. 공동으로 생산한 부가 골고루
나눠지어 혜택이 돌아가게 하는 것. 경제적 정의가 해당.
4. Social justice (사회적 정의)
인간의 사회생활에서 겪는 여러가지 차별적 요소를 없애는 것: 성차별, 계급주의, 인종차별,
혈통주의, 지역주의, 학벌주의, 종교차별 등을 없애는 것. 사회의 시스템적 정의를 확립.
5. Restorative justice (회복적 정의)
병들고 다친 사람에겐 회복이 필요하며 이를 사회가 지원한다.
6. Procedural justice (절차적 정의)
의사결정 과정의 투명성과 공평성이 이루어져야 한다.
7. Eco-justice (환경적, 생태적 정의)
인간은 어떻게 자연과 동물을 공평하게 대할 것인가? 기후와 환경문제 해결 등도 시급.
위에서 보듯이 정의의 문제는 다양하고 주어진 환경에 따라 다른 정의가 필요하다.
II. 성서에서 찾는 정의
1. 어떤 점에서 하나님을 옳다고 할 것인가? 공평한 사랑, 변하지 않는 사랑, 미래를 책임지는 사랑, 약자를 보살피는 사랑, 악을 심판하는 것, 억울함을 풀어 주는 것 등 다양한 의미에서 그를 옳다고 할 것이다.
2. 예수가 옳다고 할 때, 무슨 의미인가? 그가 본성이 선하거나 옳다는 것이 아니라 그가 한
행위가 옳은 일이며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한 일이었다. 그는 무엇을 하였는가? 하나님의 의를 이루기위해 헌신한 것이다.
-마태 5:17: 예수는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그것을 완성하고 의를 이루기 위해 왔다.
-마태 6:33: 하늘의 통치와 그의 의가 이 땅에 이루어지도록 노력하라.
3. 하나님을 따르는 자들이 옳다 할때 무슨 말인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의 의를 좆아 사는 사람들이다. 하늘의 길을 따르고 예수의 믿음을 본받아 헌신하는 자들이다. 하나님을 따르는 자들이 어떻게 하는 것이 바르고 옳은 일인가?
배고픈 자에게 빵을 공급하는 것, 약한 자를 도우고 강하게 하는 것, 일할 수 없는 자에게 보상을 하는 것, 일할 능력이 있는 자에게 일자리를 주는 것, 억울한 자의 한을 풀어주는 것 등이다. 인간생활이 다양하고 복잡하기에 그에 상응하는 정의도 다양하다.
III. 예수의 비유와 정의의 문제
예수의 비유도 여러가지 정의의 문제를 취급한다.
갑작스런 사고나 질병, 부채 등으로 거리로 나 앉으면 사회적 도움이 필요하다. 이것은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에서 본다. 사람이 억울한 일을 당하면 그것을 풀어야 한다. 이러한 정의는 과부와 불의한 재판관의 비유에서 본다. 일을 하고 싶은데 일자리가 없으면 일할 자리가 주어져야 하고 공평한 배분도 중요하다. 이것은 포도원 주인의 비유에서 본다. 열심히 일한 만큼 보상이 따른다. 달란트의 비유에서 본다.
비유해석에서 유의해야 할 점은 예수의 비유는 어떤 확립된 정통적 교훈을 주려는 것이 아니라 청중을 놀라게 하고 기존의 지식과 습관을 타파케 하고, 청중 스스로 비유의 이야기에 반응하고 질문하도록 도우는 것이다. 즉, 예수는 어떤 결론을 미리 말하지 않는다. 이야기 속에 도전적 요소가 숨어 있지만 때로는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자기가 보고 싶은 것, 듣고 싶은 것만 듣기 때문이다.
1. 달란트의 비유에서 보는 귀속적 정의 (마태 25:14-28)
두 가지의 해석이 상충된다. 혹자는 이 비유의 이야기를 반권력적 저항의 스토리로 읽는다. 즉, 악덕주인에게 돈 벌어주기를 싫어하여 1 달란트 받은 자는 의도적으로 장사를 하지 않고 땅에 숨기었고 나중에 본전 그대로 돌려주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이 비유에서 이런 메시지가 중심일까? 주인의 이야기를 자세히 보면 그가 책망하는 이유는 단순히 돈을 못 벌었기 때문이 아니라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는데 있다. 즉, 능력과 기회가 있는데도 그것을 이용하지 않고 썩히었기 때문이다. 반대로 2, 5 달란트 받은 자는 열심히 일하였고 그 결과 다행히 큰 성과를 거두었다. 여기서 만약 이들이 실패하였을 때 주인은 어떤 반응을 보일 것인가? 아마도 큰 책망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주인은 얼마나 노력을 하였느냐를 보는 것이다. 이 비유는 그러므로 “노력”을 강조하고 그에 따른 보상이 있음을 강조하는 “귀속적” 정의에 해당한다.
2. 포도원의 비유와 배분적 정의 (마태 20:1-16)
포도원의 주인이 행하는 일이 하늘의 일과 흡사하다 할 것이다. 그런데 그의 행위는 사회의 여타 주인들과는 확연히 다르다. 그는 다섯번씩이나 노동시장에 가서 일꾼을 구하여 포도원에 보냈고 모두에게 동일한 임금을 지불했다. 사실, 그는 그것을 약속했고 약속한 일당은 하루 살아가기에 적당한 임금, 한 데나리온이었다. 아주 많은 것도 적은 것도 아닌 적당한 일당이다. 이렇게 동일하게 지급을 하자 일찍 포도원에 온 자들이 불평을 하였다. 그런데 그들의 불평이 법적으로 근거가 없다. 왜냐하면 고용될 때 한 데나리온에 계약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들이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였고 욕심이 발동한 것 뿐이다. 엄밀히 따지면 그들이 더 열심히 일을 했다는 증거도 없다. 오히려 늦게 포도원에 온 자들이 더 열심히 일 했을 수도 있다. 주인은 분명히 말한다. 자기는 “선”하기에 그렇게 한다는 것이다. 즉, 포도원에 일하는 모든 사람은 그날의 일당을 가져가야 한다. 비록 늦게 온 자도 하루의 일당이 필요하다. 사실, 늦게 온자도 늦게 오고 싶어서 그렇게 한 것이 아니다. 아무도 고용하지 않아서이다. 어떤 성과나 노동시간에 관계없이 균등하게 주는 일당은 배분적 정의에 해당한다.
3. 과부와 불의한 재판관과 보복적, 징벌적 정의 (눅 18:1-8)
이 비유는 기도에 관한 것이 아니다. 누가는 그렇게 해석하고 자기의 텍스트에 넣었을 뿐이다. 원비유에 중점을 두고 보면, 이 비유는 “한”을 갚는 정의이다. 보복적 정의가 필요하다. 보복은 복수와는 다르다. 보복은 법에 입각한 정의로서 잘못한 자는 그에 대한 결과에 책임을 지고 처벌을 받아야 하고 피해는 보상되어야 하고 불의 원인은 밝혀져야 한다. 그러므로 사회 전체가 이를 계기로 발전할 수 있다. 이 과부는 어떤 억울한 일을 당하였고 이를 풀기 위해 재판관을 끈질기게 찾아가서 마침내 불의한 재판관이지만 귀찮아서 그녀의 요구를 들어 주었다는 이야기이다.
이처럼 다양한 정의는 오늘 우리에게 필요하다. 작금 한국사회가 정의가 조금씩 눈에 보이게 진보해가는 것을 볼 때 아주 기분이 좋다. 정의가 살아 있으면 개인도 행복하고 사회도 발전한다. 한국의 교회의 책임 또한 막중하다. 교회 안에서 정의를 이루고 개인이 정의에 서며 사회를 향한 다양한 정의의 필요성에 귀를 기울이고 하나님의 정의가 골고루 이 땅에 이루어지도록 해야 한다.